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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내용은, Desiringgod에 게재된 Jon Bloom의 글을 번역한 내용입니다. 마가복음 11:24를 본문으로 하고 있는 이 글은 응답되지 않는 기도로 인해 낙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계속 기도하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원문은 하단의 버튼을 클릭하여 확인하세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세 가지 주요 수단인 말씀, 기도, 교제 중에서 기도는 아마도 가장 적게 실천되고 있을 것입니다. 왜 우리는 기도하는 데 그토록 어려움을 겪을까요?

이 질문에는 많은 대답이 있을 것이고, 아마 대부분의 대답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산만해서, 게을러서, 바빠서, 기도할 모델이 없어서, 언제 어떻게 기도할지 명확한 계획이 없어서, 기도할 사람과 일이 너무 많아서, 대적이 우리의 기도를 방해해서 등등의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신비롭게 여기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기도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더 정확하게는 기도가 어떻게 작동하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성경에서 다음과 같은 약속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마가복음 11:24)

 

그런데 기도를 해도 기도에 대한 응답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가 문제인지 질문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는 우리의 믿음이 너무 작아서 하나님이 아예 기도를 무시하신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기도 응답을 방해하는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요인이 너무 많아서 결국 기도가 응답될지 모르겠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어느 쪽이든, 결과적으로 우리는 아주 간절하지 않는 한 기도를 잘하지 않게 됩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은 영웅적인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말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응답 없는 기도에 대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반응은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가 "무엇이 문제입니까?"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기를 원하십니다. 위의 대담한 약속, 즉 "[우리가] 무엇이든지 기도 안에서 구하는 것"은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로 초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위로, 더 안으로 들어오라는 초대

"무엇이든지 기도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이것이 우리에게 어려운 약속이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 믿음의 빈약함을 드러낸다는 것도 압니다. 응답이 없는 것 같은 기도에 대해 가시 돋친, 심지어 참담한 질문을 갖게 한다는 것도 압니다. 네, 저도 압니다. 우리는 비꼬듯이 "그래, 뭐 상관없어 "라고 대답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그것이 우리에게 어렵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이 약속이 우리의 한계를 넘어 우리를 압박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사실 예수님은 그것을 의도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아직 보고 경험한 것 이상으로 우리를 이끄시며,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실제로 발휘하기를 두려워하는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우리의 작은 믿음 때문에 우리를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더 높이, 더 깊이 들어오라고 초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무엇이든지"는 무슨 뜻이었을까요? 예수님은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것을 보고 놀란 제자들에게 이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을 직접 들은 한 사람이 이 "무엇이든지"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요한일서 5:14-15)

 

"무엇이든지"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모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성한 미끼를 던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로는 극단적이지 않은데 극단적으로 들리기만 하는 그런 약속이 아닙니다. 무화과나무는 진짜로 시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우리에게 산을 옮기라고 말하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1:23).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움직이기를 원하는 산을 움직여야 합니다.

 

관계의 모든 특수성

기도는 단순한 서비스 거래가 아니라 관계적인 상호작용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기도로 구하는 것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지불하는 신성한 화폐가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신뢰하는 관계적 반응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나는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굳게 믿으며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살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만큼 대담한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산이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한복음 15:7)

 

"내 안에 거하고 ...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이 말씀은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는 말씀처럼 매우 단순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서로 사랑하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내 안에 거한다'라는 것은 전혀 단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심오한 관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가진 여러 친밀한 관계 중 단순한 관계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명확하게 소통하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할가요? 특히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죄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가 관계적 의사소통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우리가 얼굴을 맞대고 마주하는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알고 관계 맺는 것이 덜 어려울 것이라고 기대해야 할까요?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기 때문에 '관계'가 가지는 모든 특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맺고 있는 다른 모든 인간관계에서 효과적인 의사소통은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하는 부분입니다. 처음에 매우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좋은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원래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의지와 노력, 신중한 경청, 겸손, 끈기, 인내, 진정한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대화를 시도하면 그 사람에 대해 이전에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발견하고 새로운 차원의 친밀감과 우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노력하지 않으면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예수님께서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눅 18:1)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응답 없는 기도 때문에 낙심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작습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응답을 지연시키는 복잡한 요인들이 있다고 말씀하시지만, 그러한 요인들과 응답 지연으로 인해 우리가 기도에 회의적이 되고 포기하도록 의도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움직이지 못할 산이 없기에 우리가 그분의 약속을 향해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구약의 성도들처럼 하나님을 알기 위해 정말 애썼던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신약성경의 신실한 남녀 성도들의 모습과도 닮았습니다. 그리고 교회 역사상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진지하게 받아들인 대담한 성도들, 즉 데이비드 브레이너즈, 아도니람 저드슨, 조지 뮬러, 허드슨 테일러, 찰스 스펄전, 로버트 채프먼 등 수많은 성도들의 삶과도 닮았습니다.

"무엇이든지 기도 안에서 구하는 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거나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 약속은 하나님을 더 깊이, 더 가까이 알기 위해 나아가라는 초대입니다. 그리고 이 초대에 응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 대담한 약속은 그것을 믿을 만큼 담대한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간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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